재대구함양군향우회
2016년 고향 문화탐방 일정표
2016. 5. 21(토)
시 정 | 활 동 내 용 | 비 고 |
08:00~09:30 | 대구 출발~함양 | 용산동 홈플러스 |
09:30~10:00 | 이동 | IC~휴천 동호마을 |
10:00~10:15 | 김종직 관영 차밭 견학 | 임창호 군수 동참 |
10:15~10:30 | 이동 | 휴천 동호~백연 |
10:30~10:45 | 백연마을 탐방 | 이억년 선생 |
10:45~11:10 | 이동 | 휴천~마천 |
11:10~11:30 | 용유담 탐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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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0~13:00 | 점심 식사 | 벽송산장 |
13:00~15:00 | 벽송사, 서암정사 탐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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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15:30 | 이동 | 마천~함양 |
15:30~16:30 | 상림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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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18:00 | 이동 | 함양~대구 |
18:00~19:30 | 저녁 식사, 해산 | 청록식당 |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관영차밭 조성터
자연석 돌에 큰 글씨를 새기고 그 아래 함양군수가 사연을 적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선생(先生)
관영차밭(官營茶園) 조성터(造成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生 1431~歿 1492)은 목민관으로 1471년부터 1475년까지 우리 고을 함양군수로 재임하시면서 군민들이 나지도 않는 차를 공납(貢納) 하느라고 온갖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시고 엄천사(嚴川寺) 북쪽에 관영(官營) 차밭(茶園)을 조성하여 그 고충을 덜어 주었으니 선생의 높은 뜻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다.
1998년 9월 일
함 양 군 수
뒷면에는 선생의 시 두 편을 번역하여 원문과 함께 새겨 두었다.
차 밭
신령한 차 받들어 임금님 장수케 하고자 하나
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씨앗을 찾지 못하였다
이제야 두류산 아래에서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또한 기쁘다.
대밭 밖 거친 동산 백여 평 언덕에
자영차 조취치 언제쯤 자랑할 수 있을까
다만 백성들의 근본 고통을 덜게 함이지
무이차처럼 명다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茶園二首(다원이수)
欲奉靈苗壽聖君(욕봉영묘수성군)
新羅遺種久無聞(신라유종구무문)
如今擷得頭流下(여금힐득두류하)
且喜吾民寬一分(차희오민관일분)
竹外荒園數畝坡(죽외황원수무파)
紫英烏觜幾時誇(자영오자기시과)
但令民療心頭肉(단령민료심두육)
不要籠加粟粒芽(불요롱가속립아)
원전을 찾아보니 아래와 같다.
佔畢齋集卷之十(점필재집권지십) / 詩(시)
茶園(다원) 二首(이수)。○幷叙(병서)。
上供茶(상공다)。不產本郡(불산본군)。每歲(매세)。賦之於民(부지어민)。
民持價買諸全羅道(민지가매제전라도)。率米一斗得茶一合(솔미일두득다일합)。
余初到郡(여초도군)。知其弊(지기폐)。不責諸民(불책제민)。
而官自求丐以納焉(이관자구개이납언)。甞閱三國史(상열삼국사)。
見新羅時得茶種於唐(견신라시득다종어당)。命蒔智異山云云(명시지이산운운)。
噫(희)。郡在此山之下(군재차산지하)。豈無羅時遺種也(기무라시유종야)。
每遇父老訪之(매우부로방지)。果得數叢於嚴川寺北竹林中(과득수총어엄천사북죽림중)。
余喜甚(여희심)。令建園其地(령건원기지)。傍近皆民田(방근개민전)。
買之償以官田(매지상이관전)。纔數年而頗蕃(재수년이파번)。敷遍于園內(부편우원내)。
若待四五年(약대사오년)。可充上供之額(가충상공지액)。遂賦二詩(수부이시)。
欲奉靈苗壽聖君(욕봉령묘수성군)。新羅遺種久無聞(신라유종구무문)。
如今擷得頭流下(여금힐득두류하)。且喜吾民寬一分(차희오민관일분)。
竹外荒園數畝坡(죽외황원수무파)。紫英烏觜幾時誇(자영오자기시과)。
但令民療心頭肉(단령민료심두육)。不要籠加粟粒芽(불요롱가속립아)。
점필재집 시집 제10권 / 시(詩)
다원에 대하여 두 수를 짓다[茶園二首] 병서(幷敍)
상공(上供)하는 차[茶]가 본군(本郡)에는 생산되지 않으므로, 해마다 백성들에게 이를 부과하는지라, 백성들은 값을 가지고 전라도(全羅道)에서 사오는데, 대략 쌀 한 말에 차 한 홉을 얻는다. 내가 처음 이 고을에 부임하여 그 폐단을 알고는 이것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지 않고 관(官)에서 자체로 여기저기서 구걸하여 납부했었다. 그런데 일찍이 삼국사(三國史)를 열람해보니, 신라(新羅) 때에 당(唐) 나라에서 다종(茶種)을 얻어와 명하여 지리산에 심게 했다 …… 는 말이 있었다. 아, 우리 군이 바로 이 산 밑에 있는데, 어찌 신라 때의 남긴 종자가 없겠는가. 그래서 매양 부로(父老)들을 만나서 그것을 찾아보게 한 결과 과연 엄천사(嚴川寺)의 북쪽 죽림(竹林) 속에서 두어 떨기의 다종을 발견하게 되었으므로, 나는 매우 기뻐하면서 그 땅을 다원(茶園)으로 만들게 하고, 그 부근은 모두 백성들의 토지이므로 그것을 관전(官田)으로 보상해주고 모두 사들여 차를 재배했는데, 겨우 수년 뒤에는 제법 번식하여 다원 전체에 두루 퍼지게 되었으니, 앞으로 4∼5년만 기다리면 상공할 액수를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시 두 수를 읊는 바이다.
신령한 싹 올려 성군께 축수코자 하는데 / 欲奉靈苗壽聖君
신라 때의 남긴 종자 오랫동안 못 찾았다가 / 新羅遺種久無聞
지금에야 두류산 밑에서 채취하고 보니 / 如今擷得頭流下
우리 백성 일분의 힘 펴일 것이 우선 기쁘네 / 且喜吾民寬一分
죽림 밖 황량한 동산 두어 이랑 언덕에 / 竹外荒園數畝坡
붉은 꽃 검은 부리가 어느 때나 무성할꼬 / 紫英烏觜幾時誇
다만 백성의 심두육*을 치유하게 할 뿐이요 / 但令民療心頭肉
속립아 농에 담아 진상하기는 바라지 않네** / 不要籠加粟粒芽
[주1]심두육 : 심장(心臟) 위의 살을 이름. 섭이중(聶夷中)의 전가시(田家詩)에 “이월에 새 실을 팔고 오월에는 새 곡식을 내어서 눈 앞의 상처는 다스렸으나 심두육을 깎아내었네[二月賣新絲 五月糶新穀 醫得眼前瘡 剜却心頭肉]” 한 데서 온 말로, 즉 먹을 것이 없어 심장병을 얻게 된 것을 의미한다.
[주2]속립아 농에……바라지 않네 : 속립아는 싸라기처럼 생긴 초춘(初春)의 차싹[茶芽]을 말한 것으로, 소식(蘇軾)의 여지탄시(荔支嘆詩)에 “그대는 무이 시냇가의 속립아를 보지 못했나 전정 후채가 서로 농에 담아 진상하였네[君不見武夷溪邊粟粒芽 前丁後蔡相籠加]” 한 데서 온 말인데, 전정 후채는 곧 송(宋) 나라 때 정위(丁謂)와 채양(蔡襄)이 서로 전후하여 맨처음 건주산(建州産) 용단다(龍團茶)를 개발해서 진상하였던 일을 가리킨 것이다. 《蘇東坡集 卷三十九》
-번역 임정기
또 그 옆에는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 탐방코스의 안내판이 서 있다.
밭 뒤쪽에는 淸風亭(청풍정)이 있는데 큰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다.
근자에 지은 휴게용 정자에 淸風亭(청풍정)이라는 근사한 편액을 걸어 놓았다.
정자 앞에는 處士雲陽姜先生遺跡碑(처사운양강선생유적비)가 서있다.
雲陽(운양)은 강창희[姜昌熙, 字(자) 俊明(준명)]의 호이다.
(2013.03.18)
[출처] 함양산책[30] 함양 김종직의 관영차밭을 찾다|작성자 열린누리
이억년
이억년(李億年, ? - ?)은 고려시대 후기의 문신, 유학자이다. 자는 인여(仁汝), 호는 요산재(樂山齋)이고 본관은 성주이다. 이조년의 형이다.
1285년(충렬왕11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여러 벼슬을 거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부임했다. 개성부 유수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당시 원나라가 국정에 간섭, 관여하자 원나라의 개입을 항의하는 시 '천재홍진몽외사(千載紅塵夢外事) 청산하처독엄비(靑山何處獨掩扉)'라는 시를 남기고 치사(致仕), 경상남도 함양군 위성(渭城) 엄천리嚴川里)로 들어가 서당인 도정정사(道正精舍)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공맹의 도를 강론하였다. 사후 성주의 안산서원, 금릉의 상친사에 제향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경기읍지』를 통해 김포와 관련하여 '투금탄(投金灘) · 투금강(投金江) · 투금뢰(投金瀨)'라고 부르는 강의 이름이 붙은 유래가 전해진다. 『성주 이씨 가승』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때 이곳에 살고 있던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강물을 건너려고 하는데, 동생이 금덩어리 두 개를 줍게 되어 하나를 형에게 주었다. 그러나 배에 탄 동생은 수중에 금덩어리가 생기고 나니 평소에 존경하던 형이 미워져 이 금덩어리는 좋은 물건이 아니라며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 버렸고, 이를 본 형 또한, 동생의 말이 옳다고 하여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이 때문에 이 여울을 '금을 던진 여울'이란 뜻의 '투금뢰'라고 부른 데서 김포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수록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포평야 [金浦平野, Gimpopyeongya]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2008. 12., 국토지리정보원)
이조년 [ 李兆年, 1269 ~ 1343 ]
본관 성주(星州). 자 원로(元老). 호 매운당(梅雲堂) ·백화헌(百花軒). 시호 문열(文烈).
1294년(충렬왕 20)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안남서기(安南書記)와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 ·비서랑(祕書郞)을 역임하였다. 1306년 (충렬왕32) 비서승(祕書丞) 재임 중, 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을 충렬왕의 후계로 삼으려 했다. 이조년은 이에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충렬왕을 보필하였으나 결국 누명을 쓰고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 유배 후 13년간 고향에서 숨어지냈다.
1330년 충숙왕 귀국 후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郞)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 수차례 원나라에 다녀왔다. 13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왕의 음탕함을 간하는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듬해 사직했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 충혜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를 남겼다.
이화에 월백하고(다정가)
이조년(李兆年)
이화(梨花)에 월백(月白) 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야 잠 못 들어 하노라.
[네이버 지식백과] 이조년 [李兆年] (두산백과)
용유담
엄천강의 상류에 있는 용유담은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인 송정리라는 마을에 속해 있다. 지리산의 아름다운 계곡들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이 곳에서 합류된다. 깨끗한 물이 용유담에 이르러서는 해가 쨍쨍 내리쬐는 화창한 대낮에 우뢰소리같은 천지폭포의 쏟아지는 소리를 비롯하여 장방형의 평평한 호수를 이루게 된다. 화강암으로 된 기암괴석이 첩첩이 쌓인 험준한 봉우리는 용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형상이라고 하겠다.
이 용유담은 신선이 노니는 별천지로서 여름이 되면 각처의 피서객들이 휴식처를 찾아 모여들어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강 동편의 직강 가설교와 고기잡는 어부의 작은 배는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라 하겠다. 여울에 높은 통방 앞에서 파닥이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는 경치와 풍광, 뱃놀이에 도취되어 다시 돌아갈 줄 모르게 하는 경승지이다. 또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방과 같이 패어진 수많은 바위들과 기암괴석들의 오목하고 볼록한 반석들은 절묘하여 일대 장관의 극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언덕 위에는 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용유담가에는 나귀바위와 장기판이라는 바위가 있다. 옛날 마적도사가 종이에 쇠도장을 찍어서 나귀에게 부쳐 보내면 그 나귀가 어디로인지 가서 (엄천사로 갔으리라고 짐작이 된다) 식료품과 생활필수품을 등에 싣고 오게 된다. 그 말이 용유담 가에 와서 크게 울면 마적도사가 쇠막대기로 다리를 놓아 나귀가 용유담을 건너오곤 하였다 한다. 하루는 마적도사가 나귀를 보내 놓고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때 마침 용유담에서 용 아홉 마리가 놀다가 싸움을 시작하였다. 용이 싸우는 소리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장기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장기에 정신을 빼앗기고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와 자연에 도취하다 보면 시간가는 줄도 모른다. 나귀가 와서 울었는데도 마적도사는 듣지 못하고 장기만 두고 있었다. 나귀는 강변에 짐을 싣고 서서 힘을 다해 울부짖었으나 반응이 없어 그대로 지쳐 죽었다고 한다. 나귀가 죽어서 바위가 되었는데 그 바위가 곧 나귀바위다. 마적도사는 나귀가 죽어서 화를 못참고 장기판을 부수어 버렸다. 그 장기판 부서진 조각이라는 돌들이 지금도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용유담 맑은 물에는 등에 무늬가 있는 고기가 살고 있었는데, 그 무늬가 마치 스님의 가사와 같다하여 '가사어'라고 불리었다 한다. 이 지리산 계곡에서만 사는 물고기이다. 또 이 지방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지리산 서북쪽에 달궁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 곁에 저연이라는 못이 있었다고 한다. 이 못에서 그 가사어가 태어나서 가을이 되면 물을 따라 내려와서 용유담에 이르러 놀다가 봄이 되면 달궁으로 돌아가는 까닭에 용유담 아래에서는 이 고기를 볼 수 없다고 한다.
용유담은 근래에 와서는 강변에 울창하던 숲이 적어지고 옛날만큼 풍치가 아름답지 못하나 학생들의 소풍장소로나 피서객들의 휴식처가 되어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또 청소년들의 캠핑장이 되기도 하여 시회나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하루의 놀이터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 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용유담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벽송사 [ 碧松寺 ]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경상남도 전통사찰 제12호로 지정되었다. 발굴된 유물로 보아 신라말이나 고려초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나 사적기가 전하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1520년(조선 중종 15) 벽송(碧松) 지엄(智嚴:1464∼1534)이 중창한 뒤 현재의 명칭으로 바꾸었으며 이후 영관·원오·일선 등이 이곳에서 선을 배웠다고 한다. 1950년 6·25전쟁 때 불에 탔으나 바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법당인 보광전을 비롯하여 방장선원·간월루·산신각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벽송사삼층석탑과 목장승 2기가 전한다. 이 중 높이 3.5m의 삼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세운 것으로 보물 제474호로 지정되었다. 2기의 목장승은 본래 높이는 4m이나 절반이 땅에 묻혀 있으며, 마천면이 변강쇠와 옹녀의 일화를 담은 가루지기타령이 전하는 곳이라 특히 주목을 받는다. 왼쪽이 금호장군(禁護將軍), 오른쪽이 호법대장군(護法大將軍)이고 재질은 밤나무이다. 이 중 금호장군은 1969년에 일어난 산불로 머리가 파손되었다.
한편 산내 암자인 서암(西庵)은 벽송사 주지였던 원응(元應)이 1989년부터 10여 년간 불사를 일으킨 곳으로 굴법당과 각종 불교조각이 눈에 띈다. 이곳의 유물로는 1997년 1월 30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15호로 지정된 묘법연화경책판과 벽송당 지엄영정, 《화엄경금자사경》 등이 전한다. 벽송당 지엄영정은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스승 지엄을 그린 영정으로, 영정에 휴정의 사언절구가 전한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16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벽송사 [碧松寺]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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