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사진

양귀비의 고사 어린 화청지

사도마루 2014. 3. 6. 23:21

 

 

2014년 1월 5일 토요일

 

  오후에 양귀비의 고사 어린 화청지를 찾았다. 화청지 진입로 잔디밭에 여산 온천 안내 표지석이 있었다. 안내문은 한자와 영어로만 되어 있었다. '주나라가 세운 아름다운 궁전(周建麗宮)'이란 비명 아래 새겨진 내용은 짧은 한문 상식으로 해석해 보았더니 이런 내용이었다.

 

여산 온천은 '천하제일천'이라는 자랑스런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서주 시대 때부터 주 왕실은 여산 일대에 궁과 정원 정자 누대를 짓고 여궁(麗宮)이라 했다. 궁안에 목욕탕을 만들었는데 목욕할 때 별을 볼 수 있어 성진탕(星辰湯)이라 했다.

 

 

 

  여산 온천은 주나라때부터 이미 온천으로 개발되어 각광을 받았던 셈이다. 이후 진나라-한나라-삼국시대-진나라-수를 거쳐 당나라 때 현종과 양귀비의 고사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익숙한 곳이 되었다. 당이 세계의 중심국가로 기능함으로서 실크로드의 한 축이 되었던 장안(長安)이기에 화청지는 세계 속의 화청지가 될 수 있었다.  

 

  위 표지석 가까이 주나라 건국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서 있었다. 하와 은의 유적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지만 중국 최초의 고대국가로 평가되는 주나라의 옛 터가 또한 이곳임을 표상하고 있다.

 

 

   화청지 입구에는 현종이 북을 치고 양귀비가 하늘을 나는 선녀인 양 북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조각상이 서 있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 겸 무희들의 모습 역시 절정에 달한 흥을 온 몸으로 폭출하고 있는 듯 한 군상이었다. 

 

 

 

 

 

 

 

 

  조형물 앞에 마련된 표지석에는 예상우의(霓裳羽衣)란 이름이 붙어 있다. '무지개 치마와 날개옷'이니 바로 선녀들이 입는 바로 그 옷이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치마 저고리를 입고 몰아의 경지에서 흐드러지게 추어대는 한 판 춤사위가 느껴진다. 북소리와 비파소리, 불 타오르듯이 물 흐르듯이 빠르게 느리게 끊어질 듯 이어지는 한 판 춤 가락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래서 설명문에는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예상우의무 霓裳羽衣舞)라 했나보다.

  예상우의곡(예상우의무)은 당 현종과 양귀비가 공동으로 창작했다고 전하며, 이 곡은 당대(唐代) 가무음악의 뛰어난 성취를 대표하는 것으로, 후대에 더 칭송을 받았던 모양이다.       

 

 

  화청지로 들어갈 때 보니 지는 해가 기와지붕 위에 걸렸다.  

 

 

  화청지 못물에 비친 전각들의 모습이 화청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다.   

 

 

 

 

  당나라때부터 있었다는 석우상엔 오가는 이들이 쓰다듬으며 빚어낸 반들거림이 천년 세월을 실감케 했다.  

 

 

  석우상 가까이 서 있는 대리석 무희상은 궁중 무희 상이겠지만 천상연회에서 춤추는 선녀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다리가 조금만 더 길었다면 더욱 아름다워 보였을 것 같다.

 

 

  화청지 내에 있는 나무들은 하나 같이 모양새가 기이했다. 아마도 인위적으로 자르고 비틀어 저렇게 만들었으리라.  안쓰러운 모습이다.

 

 

  석우상과 함께 오랜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조형물이 신화를 조각한 듯한 비석이었다. 새겨진 그림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듣지 못했다.

 

 

 

  화청지를 천하제일천으로 만든 온천물이 용출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손을 씻는 것으로 온천욕을 대신하고 바쁘게 걸음을 옮겨야 했다. 시간은 없고 돌아야 할 궁은 넓었기 때문이다.

 

 

  온천공 옆에 양귀비의 고운 자태를 조각한 대리석 나상이 온천 수증기 속에서 우유빛 속살을 살포시 드러내며 서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콧대가 조금 낮아 뭔가 좀 부족한 듯한 느낌을 주는 점이었다. 왜 양귀비의 코를 저렇게 작게 만들었을까? 조금 더 높여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도 있었을텐데...  조각상의 키가 낮아 사람들의 손이 유봉에 닿을 수 있었다면 유두가 까매졌을 텐데 다행히 큼지막하게 만들어 웬만한 사람이면 만질 수 없어 나신이 깨끗이 유지되고 있었다.  

 

 

 

  귀비상 뒤쪽 건물 너머 저 산중턱 전봇대에 하얀 외등이 달려 있는 저곳이 바로 장학량이 장개석을 구금했던 서안사변의 역사적 현장이란다. 국공합작을 이뤄냈던 역사의 현장이다. 중국이 내부갈등과 반목없이 처음부터 힘을 합해 대일전을 치루었더라면 아마 동북아 정세가 일본의 꽃놀이패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러 종류의 욕탕이 있었는데 양귀비가 주로 사용하던 탕은 해당탕 또는 부용탕이라고 불리는 탕이었다. 설명을 보니 형상이 해당화를 닮았다 해서 해당탕 또는 부용탕이라 불렸는데 일반인들은 이 탕을 귀비지(貴妃池)라고 했단다.    

 

 

  욕탕 가까이 정교한 누각이 한 채 날아갈 듯이 서 있었다. 서태후가 머리를 말리기 위해 지었단다.

 

 

 

  화청지의 1월 양류 가지엔 물이 오르는 듯 아닌 듯 봄 기운이 맺혔다.  물에 비친 전각과 나무가 현종과 귀비 두 사람이 손잡고 노닐던 그때 그 시공 속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듯하다.  

 

 

 

 

 

  화청지에서 나와 앞서 가는 일행들의 바쁜 발길을 무시하고 예상우의상 앞에 앉아 가만히 포즈를 잡으며 다시 한 번 양귀비와 현종 간의 고사를 되새기고 일어섰다.  화청지 탐방에서 인상적인 것은 50대였던 당 현종이 위구르족 출신일 것으로 생각되는 20대의 양귀비에 빠져 국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였고 위구르족 출신인 안록산이 득세하여 난을 일으킴으로써 당이 누란의 위기를 맞게되어 양귀비가 처형당하는 등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위구르인들의 독립심을 고취하게 될까봐 의도적으로 지운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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