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동부교육장(2013~2014)

복명학교 약사(略史)와 복명학교재단 재산 내역

사도마루 2014. 4. 1. 01:17

 

 

  복명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는 1910년 8월 26일, 대한제국 융희 황제 남순(南巡) 시 대구애국부인회에 하사하신 200원을 바탕으로 대구부 유지들의 기부금을 더하여 개교되었다. 대구애국부인회장 서주원(徐周原) 여사가 설립자 겸 교장을 맡았다. 

 

  그러나 명신여학교는 이듬해인 1911년 6월 14일 운영난으로 설립권을 서울 천도교중앙총본부에 양도했으며, 이를 계기로 오세창(吳世昌) 선생이 설립자 겸 교장이 되었다. 오세창 선생은 1906년 천도교 기관지를 겸한 일간지 만세보(萬歲報) 사장으로 계몽 운동을 펼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1919년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 징역형을 선고 받고 투옥되었던 바로 그 오세창 선생이시다. 

 

  천도교중앙총본부는 1916년 8월 당시 대구에 있던 달서여학교(達西女學校)까지 병합했다가  이듬해인 1917년 2월 명신학교의 경영불능을 발표했다. 이때 대구의 유지였던 이종면(李宗勉), 정해붕(鄭海鵬)씨 외 11명이 학교를 인수하고 공동설립자로서 학교를 운영했다. 1922년 1월 경영난으로 박기돈(朴基敦)씨에게  인수되고, 1924년 7월 경영난으로  다시 서희원(徐喜媛) 여사에게 인수되었다. 이렇게 경영자가 계속 바뀌던 명신여학교는 마침내 1925년 12월 26일 김울산(金蔚山) 여사에게 인수되었다. 

 

   명신여학교를 인수한 김울산 여사는 당시 보통학교규정(普通學校規程)에 의거 1926년 4월 10일 대구복명여자보통학교(大邱復明女子普通學校)로 설립인가를 받아 개교했으며, 이듬해인 1927년 8월 남자부 병치(併置) 인가를 받아 대구복명보통학교 (大邱復明普通學校)로 이름을 바꿨다. 그해 11월 12일 현재 대구동부교육지원청이 있는 신축교사로 이전하고 1928년 3월 3일 신축교사 낙성식을 거행했다.

 

   1928년 5월 26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재단법인 대구복명보통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때 등록된 재산 내역은 아래와 같았다.

 

- 대지 1,270평(時價 12,700원),

- 건물 교사 2층 연와조(煉瓦造) 2동, 부속 목조 기와집 3동 건평 합 420평 (시가 3만 7천 3백원),

- 토지 논 97필 48,477평, 밭 1필 70평(시가 30,000원)

 

   조선총독부에 재단법인 등록시 신고된 재산을 합하면 8만원이다. 시기가 약간 다르긴 하지만 한국근현대사의 가장 자랑스러운 민족운동으로 이야기되는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전국에서 모금된 돈이 13만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복명학교 개교에 투입된 김울산 여사의 돈은 매우 큰 돈이었을 것이다.

    흩어져 있는 신문 기사나 국가문서기록보관소에서 찾아낸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면 1928년 재단설립 신고시 신고된 재산 외에도 김울산 여사는 복명학교 운영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쏟아부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를 세웠을 뿐만아니라 학교 운영에 필요한 운영비를 매월 300원씩 지원했는데 중간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 당시 지역사회 유지들이 성금을 모아 김울산여사 동상을 만들었는데 1936년 동상제막식이 거행되던 날 여사는 자신이 가진 현풍, 유가 일원의 땅 300여 두락을 재단에 또 내놓았다는 신문기사 등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교명은 1938년 대구복명심상소학교(大邱復明尋常小學校)로 바뀌었다가 1941년 대구복명학교로 다시 바뀌었다.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동아시아 전역을 전쟁터로 만들고 진주만을 공격하여 미국과 전쟁을 일으키던 바로 그때였다.  

 

   전재산을 털어 학교를 세우고 가난한 조선의 아이들을 가르쳐 조국 광복에 필요한 인재로 기르고자 교명을 복명이라 짓고 자신의 이름조차 김복명으로 개명했으며 교목을 벽오동으로 정하여 조국광복에 필요한 봉황 같은 인재들이 깃들기를 염원했던 김울산 여사는 아쉽게도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돌아가셨다. 

 

   1945년 8.15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복명학교는 공립으로 전환되어 대구복명국민학교가 되고 1973년 2월 28일 폐교되었으며, 그  터에 경북여자중학교의 후신인 경혜여중이 입주했다가 1982년 8월 성당동 신축교사로 이전하고 1982년 9월 대구복명국민학교로 다시 개교했다. 1991년 복명국민학교는 범물동 신교사로 이전하고 김울산 여사의 장한 육영의지가 서린 복명학교 터는 대구 동부교육청이 입주하여 교육도시 대구의 핵심 교육지역인 수성구, 중구, 동구를 관할하는 교육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신 오세창 선생은 고종 1년(186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53년 12월 대구 대봉동 자택에서 향년 9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으며, 김울산 여사는 1858년 울산에서 태어나 1944년 대구에서 8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으니 김울산 여사가 6년 연배였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오세창 선생은 56세였고 김울산 여사는 막 환갑을 지난 62세였으며, 복명여학교를 개교한 1926년 김울산 여사는 이미 70이 다 된 고령이었음에도 학교 인수와 개교라는 미래지향적 사업을 벌렸다. 정말 대단한 어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