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에서 내려와 전주 향교를 찾았다. 조선시대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서당 교육을 마친 사람은 중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향교나 서원에서 공부를 했다. 요즘으로 치면 향교는 국공립학교요 서원은 사립학교였다. 향교나 서원은 학생 교육과 선현 배향을 주업무로 했다. 관학인 향교는 중앙의 성균관과 함께 국가 권위를 상징하는 교육 및 향사 기관으로 대성전을 두고 공자와 선현들을 배향했지만 사학인 서원에서는 공자를 배향할 수 없고 다른 선현들만 모실 수 있었다. 전국의 향교는 모두가 하나같이 공자를 배향하므로써 국가 통합의 기반이 되었으나 서원은 배향된 선현을 기리고 따르면서 조성된 학문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같은 정치적 성향을 갖게 되어 조선 사회의 폐단이 된 붕당의 기반이 되었다. 좋게 말하면 서원은 요즘 말하는 지방분권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게 되었으나 서원의 발전으로 향교는 그 역할이 제향에 국한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릴 때 조선에는 600여개의 서원이 있을 정도로 번성했으나 향교는 지방 수령이 있는 군현에만 존재해 숫적으로도 열세였던 셈이다. 전주향교 앞에는 커다란 비석들이 즐비했다. 오랜 전통과 역사를 보여주는 물증들이다.
향교 안 뜰에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 은행나무는 벌레가 끼지 않는 나무라 관리들의 청렴성을 상징하는 나무로 흔히 향교 경내에 심겨진 대표적인 나무였다. 수령이 수백년은 됨직한 거대한 은행나무엔 은행알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노란 은행잎이 낙엽져 떨어지고 은행알만 나무에 남아 있었다.
맞은편 은행나무는 숫나무로 알도 잎도 없이 나신만 드러낸 채 서 있다. 오랜 세월 뇌우벽력 속에 생긴 상채기를 시멘트 보진재로 감싸 안은 채 대성전 앞 마당을 지키고 있다.
대성전 안에는 익히 보아온 공자님 초상이 걸려 있었다. 대성전 안을 보기는 처음이라 모셔진 위패들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중앙에 공자 초상이 걸려있고 앞에는 大成至聖文宣王이란 위패가 놓여 있다. 그리고 공자의 왼쪽에는 설총(弘儒侯 薛聰), 오른 쪽에는 최치원(文昌侯 崔致遠)의 위패가 있고 좌우 벽쪽으로는 우리 나라 거유들의 위패가 놓여있다. 동쪽 설총 위패에서 조금 떨어진 벽면에는 앞에서부터 안향(文成公 安珦), 김굉필(文敬公 金宏弼), 조광조(文正公 趙光祖), 이황(文純公 李滉), 이이(文成公 李珥), 김장생(文元公 金長生), 김집(文敬公 金集), 송준길(文正公 宋浚吉)의 위패가 있고 서쪽 최치원 위패에서 조금 떨어진 벽면에는 앞에서부터 정여창(文獻公 鄭汝昌), 이언적(文元公 李彦迪), 김인후(文正公 金麟厚), 성혼(文簡公 成渾), 조헌(文烈公 趙憲), 송시열(文正公 宋時烈), 박세채(文純公 朴世采)의 위패가 차례대로 늘어서 있다. 중국 5성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신라 2현 설총, 최치원 고려 2현 안향, 정몽주 조선 14현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시채 김굉필, 조광조, 이 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총 23명이 배치되어 있다. 추기 :대구향교의 경우 여기에 더하여 중국의 2현 정호(정자)와 주희(주자)가 향사되고 있다. 대구 향교 배향자 신위 배치는 아래 사진 내용과 같다. 전주 향교 내 향사자 위치도를 사진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중앙에 위치한 대성지성문선왕 공자
연국복성공 안자, 기국술성공 자사
추국아성공 맹자, 성국종성공 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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