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대구함양군향우회원 고향 문화 탐방
일시 : 2015. 6.13(토) 08:00~21:00
출발지 : 지하철 2호선 용산역 5번 출구
참가자(예정) : 42명
● 행사 진행 시정
시간 |
추진 내용 |
비고 |
8:00 |
대구 출발 |
용산역 5번 출구 |
10:00~11:00 |
수동 남계서원, 청계서원 |
담당공무원, 해설사 합류 |
11:10~12:10 |
지곡 개평 한옥마을 |
임창호 군수 합류 일두고택 , 풍천노씨 대종가 등 탐방 |
12:30~13:30 |
중식 |
금호식당, 안의 찜갈비 |
14:00~15:00 |
서상 논개 묘 |
|
15:30~16:00 |
서하 군자정, 거연정 |
연암공원, 용추계곡을 안 갈 경우 거연정에서 농월정까지 선비길 트래킹 후 화림동에서 탁족 |
16:10~16:40 |
안의 농월정 | |
17:00~18:00 |
연암공원, 용추폭포(가변적) | |
18:00~19:40 |
대구 귀환 |
|
19:40~21:00 |
석식 및 탐방행사 정리 |
청록식당, 어탕국수 |
21:00 |
해산 |
● 참가자 (42명)
연번 |
참가자 |
전화 |
연번 |
참가자 |
전화 |
1 |
강석홍 향우 |
22 |
양경화 향우 |
| |
2 |
강석홍(부) 권태선 |
|
23 |
연규순 향우 |
|
3 |
강정옥 이사 |
|
24 |
염정숙 이사 |
|
4 |
권명희 향우 |
|
25 |
윤선오 향우 |
|
5 |
권충현 회장 |
|
26 |
이명숙 이사 |
|
6 |
권충현(부) 김선화 |
|
27 |
이영호 위원장 |
|
7 |
김일순 향우 |
28 |
이영호(부) 장정옥 |
| |
8 |
김종수 부회장 |
29 |
임효선 향우 |
| |
9 |
김춘자 향우 |
30 |
전은영 향우 |
| |
10 |
김판곤 부회장 |
31 |
정기호 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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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김해옥 이사 |
32 |
정인상 감사 |
||
12 |
김혜숙 이사 |
33 |
정인상(부) |
||
13 |
노경선 향우 |
34 |
정정자 향우 |
||
14 |
노상진 부회장 |
35 |
정필자 향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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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노택환 학장 |
36 |
최경철 이사 |
||
16 |
류병수 이사 |
37 |
한충량 이사 |
||
17 |
방창영 이사 |
38 |
허점수 이사 |
||
18 |
배종근 이사 |
39 |
허점수(부) |
||
19 |
배종근(부) |
40 |
홍성희 향우 |
||
20 |
서정돌 고문 |
41 |
홍갑득 부회장 |
||
21 |
서점석 감사 |
42 |
조옥순 부회장 |
(현지합류) |
● 행사 관련 언론 보도 자료
재대구함양군향우회원, 고향문화재 배우러 ‘함양투어’ 기사입력 : 2015년06월09일 12시42분 (아시아뉴스통신=김상문 기자)
경남 함양군은 재대구함양군향우회(회장 권충현) 향우들을 모시고 오는 13일 ‘고향투어’에 나선다고 밝혔다.
이번 투어는 재대구함양군향우회가 대구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고향사랑을 잊지 않고 실천해오데 감사의 뜻으로 고향 문화제를 알아보기 위해 시행하는 것이다.
이날 오전 40여명의 향우들가 수동면에 도착하면,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중인 남계서원과 청계서원을 탐방하고 지곡면 개평한옥마을로 이동해 함양 선비의 지조 있는 상징적 인물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을 둘러본다.
이어 오후엔 서상면 금당리 ‘의암 논개묘역’을 찾아보고, 서하면 거연정으로 이동해 선비문화 탐방로 등을 걸으며 함양선비문화를 만끽하게 된다.
끝으로 12년 만에 복원되는 농월정 현장과 자연과 어우러진 절경을 연출하는 안의면 용추사를 둘러본다.
권충현 회장은 “우리 300여명의 재대구함양군향우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못지않게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며 고향발전을 기원해왔다”며 “이번 문화재탐방으로 내 고장을 더 잘 알고, 대내외에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 탐방지 개관
-인터넷 검색 자료-
남계서원
정여창(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1552년(명종7)에 지었다. 1566년(명종 21)에 나라에서 ‘남계(灆溪)’라는 사액을 내려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603년(선조 36)에 나촌으로 옮겨지었다가,1612년(광해군 4) 옛 터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숙종 때 강익(姜翼)과 정온(鄭蘊)을 더하여 모셨다. 따로 사당을 짓고 유호인(兪好仁)과 정홍서(鄭弘緖)를 모셨다. 별사는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정여창을 모신 서원은 전국적으로 9곳에 이르며, 그 중 주된 곳이 남계서원이다.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남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2009년에는 사적 제499호로 지정되었다.
청계서원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그의 스승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사건에 연루되어 무오사화로 희생되었다. 글에 뛰어났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였다. 연산군 1년(1495)에는 ‘청계정사’를 세워 유생을 가르쳤고, 광무 10년(1905)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그 뒤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청계서원이라 하였다. 구경재와 동재, 서재, 홍남문, 솟을삼문 등의 건물이 남아 있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개평한옥마을
600년 옛 전통과 문화를 간직한, 기품 있고 아름다운 한옥마을로 손꼽히는 함양 개평마을은 조선조 오현 중 한명인 일두 정여창(1450∼1504)선생의 고향이자 수많은 유학자를 배출한 영남지역 대표 선비마을이다.
이곳에는 국가지정문화재 등 일두 고택을 비롯 하동정씨 고가, 풍천노씨 대종가, 노참판댁 고가 등 100년 이상 한옥이 60여 채나 있어 연중 국내외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논개 묘
논개(論介, ?~1593)는 진주목의 관기로 임진왜란 중 2차 진주성싸움에서 이긴 왜군이 촉석루에서 자축연을 벌일 때 왜장을 남강가로 유인하여 끌어안고 강물에 빠져 순절한 의기이다.
구전돼 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자화된 것은 1620년 무렵 유몽인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하면서부터이며, 그녀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岩)'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논개의 충성심은 이미 의심할 바 없었는데도 일부 보수적인 사대부들은 편견을 내세워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鋼行實圖)"에 논개를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진주사람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그의 의혼을 위로하는 한편, 국가적인 추모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결국 의기 논개가 공식적인 호칭이 된 때는 경종1년(1721) 경상우병사 최진한이 논개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여 그의 순국사실을 국각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이후이다. 이후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노력으로 논개의 혼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처음 세워지고, 매년 논개추모제가 성대히 치러지게 되었다.
논개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은 덕유산 육십령을 넘기 전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일명 장계) 주촌마을이다. 이곳에 논개의 생가가 복원돼 있으며, 장수읍 두산리에 의암사라는 논개사당과 논개의 수명비가 세워져 있다. 한편, 논개의 묘는 경남 함양군 서상면 장지리의 당산 뒤편 골짜기에 있다. 최근 사적지로 지정되어 묘역이 대대적으로 정화되었다.
장수와 함양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논개의 일생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열네 살 나던 해인 1578년, 아번지 주달문이 죽자 천하 건달인 숙부가 토호인 김풍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고 팔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가 외가인 안의의 봉정마을로 피신하였는데, 김풍헌이 당시 장수현감인 최경회에게 이를 알려 심문을 받게 하였다. 논개 모려로부터 전말을 들은 최경회는 이들을 무죄로 인정하고,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최씨 부인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논개의 재색에 감탄한 현감 부인이 최경회에게 논개를 소실로 맞이 할 것을 권유한 뒤 지병으로 숨을 거둔다.
이렇게 해서 논개가 18세 되던 해 1591년 봄, 최경회를 따라 장수를 떠났다. 최경회가 1593년 경상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진주성싸움에 참가하게 되자 논개도 진주길을 떠났는데, 진주성 함락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뒤 진주성싸움에서 살아남은 장수 의병들이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건져 고향땅에 장사 지낼 요량으로 운구해오다 함양군 방지리 골짜기에 묻었다.
거연정
거연정은 농월정과 함께 함양을 대표하는 정자로 알려진 곳이다.
덕유산에서 흘러내리는 이 화림동계곡은 예전부터 팔담팔정(八潭八亭)이라 하였는데 여덟 개의 담(潭)과 여덟 개의 정자가 있는 계곡을 뜻한다.
예부터 주변 경치가 수려한 곳에는 정자를 두었다. 정자에 앉아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시를 읊거나 술을 한잔 기울이기도 하였다.
거연정은 정자에 올라 주변 경치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치 속에 정자가 들어앉아 있는 점이 특이하다.
물론 거연정에 올라앉아도 경치를 감상할 수는 있지만 과감하게 계곡 한가운데 있는 바위섬에 정자를 두었다는 점이 무척 특이하다. 또한 이 거연정으로 가기 위해 철교인 화림교를 건너가야 하는 것도 운치를 더한다.
출처 : http://www.hyulimbook.co.kr/87821
농월정
함양의 농월정(弄月亭)은 정자가 많기로 유명한 함양을 대표하는 정자이다. 함양에는 남덕유산에서 흘러내려오는 화림동계곡을 따라 정자들이 줄지어 있는데, 이 화림동계곡의 정자들 중 가장 경관이 좋은 곳에 마지막으로 들어앉은 정자가 농월정이다. 화림동계곡이 이 농월정 앞에서 거대한 너럭바위를 만나 바위 위를 급하게 타고 흐르는데, 이 계류의 흐름이 아주 멋지다. 이 농월정 앞의 너럭바위가 월연암(月淵岩)이다. 농월정(弄月亭)이 달을 음미한다는 의미이고 월연암(月淵岩)이 달의 연못이란 의미이니, 옛날부터 농월정에서 하늘의 달과 월연암에 흐르는 달빛을 즐겼던 것 같다.
농월정은 정자라기보다는 누각에 가까운 규모이다. 화림동계곡 옆에 자리한 농월정은 정자 자체도 반듯하지만, 계곡 건너편에서 화림동계곡의 월연암과 함께 바라보면 그 멋진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농월정은 화재로 소실되고 아직 복원이 되지 않은 상태다.
출처 : http://www.hyulimbook.co.kr/2975
● 명심사항
모두가 행복한 건전하고 안전한 여행, 참가자 모두의 가슴에 고향 사랑이 샘솟는 여행, 향우들 간의 정이 돈독해지는 친목여행을 위하여 다음 사항을 꼭 준수합시다. - 자신의 안전에 최대한 주의 - 서로에 대한 배려와 정다운 인사 - 향우회 고향 탐방행사에 걸맞지 않는 언행 자제 - 내가 만든 쓰레기는 내가 정리하여 깨끗한 고향 환경 유지 노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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