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향기

점필재 김종직, 신재 주세붕 선생 문묘 추숭 제안

사도마루 2018. 6. 28. 10:27



점필재, 신재 양 선생의 문묘 추숭  
 
조선조 오백년 역사를 환고할 때 업적이나 성취에 비해 저평가 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신재 주세붕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점필재 선생은 조선의 성리학을 은사(隱士)의 수제(修齊) 차원 학문에서 사회적 기풍 쇄신을 위한 치평(治平) 차원의 학문으로 확장한 학자다. 그의 제자와 재전제자들은 여러 사람이 묘당에 존숭되었다. 그럼에도 정작 본인은 묘당에 들지 못하고 있다. 재평가와 묘당 추숭 논의가 필요하다.  
신재 선생은 조선조 성리학 발흥에 결정적 기여를 한 서원교육의 주창자일 뿐만 아니라 위민 애민의 청백리로 학자로서 관리로서 만세의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예우나 존숭을 받지 못 하고 있다. 신재 선생 역시 묘당 추숭이 합당한 선현이시다. 
 
점필재 선생은 포은 -야은-강호의 정통 학맥을 이어받아 한훤당, 일두,탁영 등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 조선에 새로운 사회적 학문적 기풍을 진작한 신진사류들의 큰 스승이었다. 그러나 점필재 선생은 조의제문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함으로써 그 이후 왕들의 정통성을 훼손했으며 사화의 단초를 제공했기 때문에   조선 왕조에서는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세조 이후의 왕들은 모두 세조의  자손들이었으니 점필재가 정당화되면 왕실의 정통성이 훼손되는 모순관계였다. 중종반정 후 복권되고 숙종 때는 영의정에 추증 되었으나 묘당엔 추숭되지 못하였다. 조선조 성균관이나 향교에서는 모시지 않았지만 현대의 성균관이나 향교에서는 마땅히  모시고 존숭할 만한 조선조의 큰 선비였다. 점필재 선생의 묘당 추숭은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지금 논의해볼 가치가 있는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선생은 1495년부터 1554년까지 사신 어른이다. 퇴계와 남명, 그리고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공보다 6세, 하서 김인후 선생 보다는 15세 연상으로  생전에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4대 사화를 모두 지나왔지만 아버지께서 주신 엄중한  세 가지 가르침, 신구(愼口), 신신(愼身), 신심(愼心)을 지킴으로서 사화를 피하고 청백리로서의 영명을 온 세상에 떨친  대붕 같은 선현이다. 
 
신재 선생은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이듬해 1542년에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의 고향 순흥에 사우를 짓고 그 이듬해인 1543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건립했다. 이것이 조선조 말 대원군의 서원정리 때  천 수백 곳에 달하던 조선조 서원의 시원이다. 백운동서원은 6년 후인 1549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가 사액을  청하는 글을 올려 소수서원이란 이름으로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1550년 일이었다. 
풍기군수를 지낸 신재선생은 중앙관직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 고려 때 9재학당, 문헌공도로 유명한 해동공자 최충선생의 고향 해주에 선생을 기리기 위한 서원을 건립했다.  명종 5년 1550년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두번째 세워진 문헌서원이다. 첫번째, 두번째 서원을 신재선생이 세웠으니  조선조 서원의 시작과 확산을 모두 혼자 이룬 셈이다.  
 
신재선생은 서원 설립만이 아니라 위민, 애민의 청백리로서의 면모도 돋보인다. 하서 김인후 선생과 필암서원, 박수량의 백비로 유명한 장성군에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청렴문화센터가 있다. 그곳에 가면 공직자의 청렴과 관련된 자료들이 가득하다. 그 중에는 멀리 영남의 인재로 신재 주세붕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이 소개되어 있다.  
 
신재선생이 풍기군수로부임했을 때 풍기 주민들은 소백산에서 나는 산삼을 공납품으로  나라에 내어야 했는데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컸다. 신재 선생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백산 산삼씨를 받아 재배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소해 주었다. 이 업적은 당대의 공삼 문제 해결을 넘어 오늘날 풍기 인삼이 있게한 위대한  지도자로서의 업적이니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에도  살아 있는 풍기 경제의 은인인 셈이다. 신재선생은 아마도 점필재선생이 함양의 군수로 부임하여 차 공납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위해 지리산에서 차나무를 찾아 관영 차밭을 만들어 공납의 멍에를 벗어나게 한 전례를 효칙한 듯 하니 선현들의 위민, 애민을 본받아 실천한 훌륭한 목민관이요 중용에 나오는 견선여기출을 실천한 선비중의 선비였다. 
 
이런 신재선생이지만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사람 정도로만 사람들이 알고 있으니 아쉽고 안타깝다.
신재 선생은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였다.  퇴계선생의 고제 월천 조목 선생이 합천군수로 있을 때 조목선생과 동갑인 신재 선생의 양아들 박이 부친의 행장을 받으러 왔다가 병을 얻어 객사하셨다는  월천선생 관련 연구 내용으로 보아 신재선생의  후손이 번성하지 못 했기 때문에 신재선생에 대한 평가와 추숭이 미흡한 것 같아 아쉽고 안타깝다.  
 
신재 선생의 서원 창도 업적과 위민 애민 청백리 정신을 정당하게 평가한다면 묘당에 추숭하는 것이 조금도 누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제자가 적고 잘난 후손이 부족해 저평가 되어온 신재 선생을 재평가하여 묘당에 추숭하는 것은 현대 한국의 시대정신과도 부합되는 일이라 사료되어 신재 선생의 묘당 추숭 문제를 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