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 표지석과 수창초등학교
2014. 6. 12.
강동문화체육센터 및 동촌역사도서관 (東村驛舍圖書館)개관식을 마치고 귀청하는 길에 수창초등학교를 들렀다. 내일 오전 9시 반에 윤순영중구청장 당선자가 예방하겠다고 시간 약속을 잡아두었는데 중구청 쪽에서 근대로의 골목여행 코스 보강을 위해 순종 어가길 조성과 국채보상운동 발상지 광문사터 접근로 확보를 위해 수창초등학교 부지 일부를 활용할 수 있도록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인 광문사터가 수창초에 있는 것은 중구청의 확대 계획서를 보고서야 처음 알았다. 학교에 도착하니 학교장을 비롯한 관계자들과 우리청 재정팀이 나와 있었다.
수창초는 금년 2월에 100회 졸업생을 배출하기까지 기라성 같은 인재들을 길러낸 대구 최고의 명문 초등학교이다. 대통령 영부인도 나오고 국회의장도 둘이나 나오고 한 시대를 주름잡던 예술인도 나왔다. 학생수가 많았을 때는 재학생이 6,000명까지 됐었다고 한다. 그랬던 도심 학교가 현재는 학생이 120명에 불과한 미니학교다. 도시공동화 현상이 얼마나 강도 높게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청에서는 작년부터 행복학교로 지정하고 행재정적 지원을 통해 학생들이 오고싶어하는 학교로 만들기 위해 심력을 쏟아왔다.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광문사터는 수창초등학교와 대성사라는 절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대성사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에 광문사터 표지석이 있는데 표지석 앞은 대성사 주차공간으로 장애인 주차 표지가 붙어 있었다. 그 좁디 좁은 공간에 그것도 남의 절 주차장과 담장 사이 한켠에 서있는 국채보상운동발원지 표지석은 국채보상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생각할 때 그동안 참으로 기가막힌 대접을 받아온 셈이다.
중구청에서 국채보상운동발원지 광문사터 표지석에 근대로의 골목여행 여행객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수창초 부지 일부를 이용해 진입로를 내고자 한다면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적극 수용해야겠다. 다만 중구청에서 요구하는 것처럼 5미터 정도를 할양하면 수창초등학교 뒤쪽으로 수목관리 차량이나 소방차량 진입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학교측의 주장을 감안하여 2미터 정도 담장을 뒤로 물려 접근로를 개설토록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된다.
중구청에서는 진입로 개설 부지 요청과 함께 수창초 야구부의 숙소였던 비봉관 사용권까지 별건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운동장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비봉관을 주게되면 반듯한 학교부지가 왜곡될 뿐만 아니라 명덕초 운동장 한켠에 2.28 기념관을 짓게 해주면 뒤쪽 도로 부지로 대체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기념관을 짓고는 민원을 이유로 대체지는 넘겨주지 않았던 전철을 밟을 것 같아 사용권을 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건축된지 40년이 넘었고 내부가 낡아 누전 등의 위험이 있으며 숙소로 사용하던 야구부가 없어져 방치되고 있는 만큼 비봉관 건물을 그냥 놔두는 것은 학교 미관상이나 학생 안전상 좋지않으므로 철거해야겠다. 대신 후문부터 어가길까지 지금은 도로가 협소하고 주민들의 차량이 빼곡하게 주차되어 있어 학생들의 안전 통학이 담보되지 못하고 있는 만큼 학교 운동장 안쪽으로 2~3 미터 노폭의 학생 안전통학로를 만들어 주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국채보상운동 발상지 광문사터 표지석의 유일한 접근로 대성사 입구 모습
수창초 담장과 광문사 표지석 사이의 포대화상 석상
대성사 장애인 주차장과 광문사터 표지석
국채보상운동발상지
광문사 터
1907년 1월 23일
광문회 회원들은
일본에 진 나라 빚
일천삼백만원을 갚기 위해
담배를 끊기로 결의했다.
2년여 동안 불타오른
국채보상운동의
첫불길이다.
대성사를 거치지 않고 광문사터 표지석으로 가는 접근로를 개설할 수 있는 수창초 화단 공간. 사진 왼쪽 전등 아래 국채보상운동 발상지 광문사터 표지석이 있다.
수창초가 배출한 인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