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장의 하루 -사대부고, 새론초, 복명초, 김울산
2014년 3월 4일 하루 일과
아침 5시. 기상. 누워서 몸풀기 운동으로 몸을 깨우고 일어나 절로 허리를 풀고 앉아 간 밤에 읽던 김형오 전 국회의장님의 '술탄과 황제' 를 조금 더 읽고 오늘 할 일을 정리했다.
6시 20분. 샤워를 하고 출근 준비를 했다. 안사람이 감기 기운이 조금 더해진 것 같다.
7시 정각. 1층에 내려오니 이 주무관이 벌써 와서 대기하고 있다. 사대부중고에 도착하니 7시 30분인데 입구에 경찰청, 교육청, 학교 관계자들이 아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도 학교폭력추방 캠페인 어깨띠를 두르고 아이들을 맞이했다. 중부경찰서 쪽에서는 이서장과 여성청소년과 윤과장 등 관계자들이 포돌이 포순이 마스코트까지 챙겨가지고 와서 참석하고 있었고 우리 교육청 쪽에서는 사대부중고 교장, 교감들, 시교육청의 학생생활문화과장과 장학관 장학사들이 동참했다. 시장 예비 후보인 이재만 전동구청장도 함께 하면서 학교폭력 추방 리플렜을 나눠주었다. 경찰청장과 교육감님도 열심히 캠페인 활동을 했다.
8시. 아이들 등교 시간이 끝나고는 경찰청장, 중부서장과 여청과장, 교육감님, 학생생활문화과장, 송승면국장과 함께 사대부고 교장실에 들려 차를 한 잔하면서 교장석 뒤에 걸려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이라는 휘호를 가지고 담소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영남대학교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등장했다.
교장실을 나와 사대부고 역사관을 둘러보고 시문화재로 지정된 체육관과 사대부중 담쟁이 교사 뒤쪽 공간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휘호석과 박정희 나무 로 명명된 버드나무를 살펴보았다. 박정희 나무는 교사 증축 때문에 운동장 서편 담 옆에서 휘호석 가까이로 작년에 이식되었다.
9시 40분. 새로이 출범하는 새론유치원 입학식 축하를 위해 김연일 창의인성과장을 대동하고 청을 나섰다. 10시 25분쯤 신서동 새론유치원에 도착하니 많은 학부모님들이 아이들과 함께 등교하고 있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학교라는 조직에 들여보내는 부모님들의 마음은 기대에 부풀어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성장과 행복을 축복하는 오직 그 한 마음으로 함께 하는 유치원 입학생 부모님들이었다. 원장실에 들렸더니 시교육청에서 권연숙과장이 나와있었다.
차를 한 잔하고는 바로 입학식장에 들어갔다. 3세에서 5세 사이 아이들이 질서정연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참으로 대견스럽고 사랑스러웠다. 보이는 아이들 하나하나가 모두 이쁘고 귀여웠다. 이 아이들 모두가 바로 우리들의 미래요 희망아닌가. 국민의례가 있고 곧 교육장 축하인사가 있었다. 유치원 개원과 첫입학식을 축하하고 아이들에게는 유치원에서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 행복한 사람이 되라고 축복해 주었다. 학부모들에게는 아이들이 자존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집에서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경어를 사용해 주실 것과 아이들이 부모님께 경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지도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언어는 인격이 드러나는 것으로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경어를 쓰면서 아이들이 부모님들께 경어를 사용하게 한다면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학생들의 인성 문제는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니 아이들에게 경어를 쓰자고 했다.
11시 30분. 입학식이 끝나고 담임들과 자기 반에 입실하여 첫 수업에 임하는 아이들을 둘러보고는 학부모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급식 시식회가 열릴 유치원 식당에 들려 영양사와 조리사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청으로 돌아왔다. 귀청하는 길에 어제 숙천초등학교에서 제1회 입학식을 치룬 새론초등학교를 방문하고 올려고 했으나 행재정지원과 신규 전입 직원들 환영 오찬 시간이 촉박하여 바로 귀청했다. 12시부터 낙산식당에서 명태찜과 쌈밥으로 오찬을 함께 하며 신입 직원들을 환영하고 격려했다. 오늘도 건배는 숭늉으로 했다.
오후 2시. 아양중학교 교장 교감이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 오보라며 담임교사의 교무수첩을 증거로 들고 들어왔다. 갈수록 교직생활이 어려워지고 있다.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믿음이 교육의 가장 소중한 기반인데 그 기초 기반이 부인당하고 있으니 어찌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겠는가. 교육의 성패는 교사에게 달려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결국 교사가 존경받고 신뢰받는 존재로 존재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교육의 성패가 가름난다는 말이 된다. 학부모가 교사의 신뢰를 무력화시키면 결국 그 피해는 아이들에게로 돌아갈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교사들이 소신을 가지고 교육에 임할 수 있으며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교단에 설 수 있겠는가. 그냥그냥 무탈하게 시간만 보내고 급료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드는 이런 학부모들로부터 교사들을 지켜내지 못하면 결국 학생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오후 3시. 국채보상운동기념탁본사업회 회장과 간부인사들이 인사 겸 원고 청탁을 위하여 찾아왔다. 한국근현대사 시간에 우리 대구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자부심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번진 국채보상운동이다. 당시 이토히로부미 등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사업을 발의하고 추진하면서 억지로 우리 정부에게 1300만원의 돈을 대어주고는 자주적 독립권을 침해했었는데 나라의 독립을 훼손하는 국채를 갚자는 장한 뜻으로 모은 돈이 13만원이었다고 했다.
오후 4시. 복명초등학교 방문. 동부교육청이 있는 이 자리는 본래 복명초등학교가 있던 곳이다. 1895년 초 고종께서 교육조서를 반포하고 나서는 교육을 통해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바로세워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났으나 러일전쟁을 통해 우리나라에 대한 주도권을 잡은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정미7조약, 1908년 학교령 등을 통하여 조선 침탈을 하나하나 추진해 나갔다. 이즈음 선각자들을 중심으로 인재육성을 통해 넘어가는 나라를 지키고 되살리고자 하는 노력들이 나타났다. 이때 세워진 학교들 중의 하나가 1900년 개교한 명신여학교였다. 장한 뜻으로 세워졌으나 명신여학교는 운영난으로 몇 차례 운영자나 설립자가 바뀌었다. 명신여학교는 우여곡절 끝에 1925년 김울산 여사가 교주가 되었으며, 그 이후 거금을 들여 새로운 학교를 만들었다. 쌀 한가마니에 20원 하던 시절 4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토지를 사고 건물을 지었다. 그 후에도 학교 운영비를 지원했으며 학교운영을 위해 현풍 등지의 300두락 논까지 희사했다. 전쟁과 혼란 통에 그런 통큰 지원도 묻혀지고 잊혀졌으며 지금은 학교에 희사된 땅들이 모두 다른 사람들 소유로 넘어가고 없다. 작년에 시교육청 재정팀이 현풍에서 자투리 땅 세 필지를 찾았다니 그 당시 신문 기사 내용이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고인의 큰 뜻이 세월 속에 묻혀지고 잊혀진 것이 너무 아쉽다.
김울산여사의 장한 뜻이 어려있는 바로 그 땅을 받아쓰고 있는 동부교육지원청 교육장으로 온 내가 이 사실을 인지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달포 전에는 행재정팀 직원들과 덤불우거진 조야동 함지산 자락을 헤매며 김울산 여사 산소를 찾아 헌주 참배하고, 2월 정책협의회 때 교육감님께 그 장한 업적을 현창하자는 건의를 했더니 흔쾌히 동조하여 내일 교육감님이 직접 김울산 여사 산소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다. 김울산 여사는 알면 알수록 참 대단한 어른이요 선각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복명학교 방문은 김울산 여사 산소와 비각 방문을 나가기에 앞서 김울산 여사의 흉상을 보기 위함이었다. 복명학교 교정엔 김울산여사의 흉상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김울산 여사의 장한 덕업을 기려 1937년 당시 대구 지역의 사회 지도자들이 합심협력하여 좌상 동상을 건립하여 헌정했는데 2차 대전 말기 공출로 청동상이 없어지고 대신 돌로 만든 흉상이 지금 우리 동부교육지원청 자리인 복명학교 교정에 세워져있었으나 복명학교 이건시 석상도 옮겨졌다. 나의 방문을 알고 학교측이 관련 자료를 모두 준비하여 브리핑을 잘 해주었다. 복명학교에 김울산 여사와 관련된 기록과 자료들이 어느 정도 잘 정리되어 있었다. 6시 30분에 학교를 나와 곧장 귀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