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곡 선생을 생각한다.
대구중학교에서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월급 받으며 공부만 할 수 있는 정말로 멋진 특별한 기회, 내 생애 최고의 행운을 얻었다. 한국교원대학원이 설립되고 현장교사들을 선발하여 특별연수 형식으로 더 공부시키는 제도가 만들어졌는데 그 제도의 1기 수혜자로 선발된 것이다. 우리가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88올림픽을 준비하던 바로 그 시절이었다.
한국교원대학원 파견 석사과정 특별연수 기간 동안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은 전국 시도교육청에서 파견되어 온 초중등 교사 25명이었다. 이때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은 나름대로 하나같이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 한 사람이 경북교육청에서 파견되어 온 윤리를 전공했던 박시영선생이다. 박시영 선생은 당시 한국교육사 연구의 거목 손인수 교수님과 프랑스에서 3개의 박사학위를 따온 철학교수 변규룡 대학원장님의 지도를 받으며 율곡선생의 경장사상을 연구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기숙사에서 늘 함께 숙식을 함께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교육현실에 대한 논의, 자신의 논문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그때 들은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한 방에 있기도 했던 박시영 선생으로부터 율곡 선생에 대해 들은 것이 많았다.
퇴계선생과 함께 널리 회자되고 있는 율곡선생은 익히 알려진 것처럼 중종 31년(1536년)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시서화에 능한 여류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태어났으며 그 어머니에게서 유학교육을 받았다. 율곡은 말을 배우면서부터 글을 읽을 줄 알게 되었고 8세에 시를 잘 지었으며, 13세에 당시 진사시험에 합격했다고 하니 어머니의 훌륭한 가르침만이 아니라 타고난 천재였던 것 같다.
나이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돌아가시자 율곡은 3년 간 시묘살이를 하고 19세에 홀연 금강산 산사로 입산을 해버렸다. 어머니를 잃은 율곡의 상실감과 인생 무상에 대한 인식이 매우 깊었던 모양이다. 다행이 율곡의 회의와 방황은 오래 가지 않고 20세가 되던 이듬해 외가로 돌아와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자칫했으면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유학자의 한 사람인 율곡이 산사의 승려로 살아갈 뻔 했다.
21세에 서울 본가로 올라온 율곡은 한성시에 응시하고 수석으로 합격을 했으며 그 이듬해인 22세에 성주(星州)의 노씨(盧氏) 처자와 결혼을 한다. 23세 때 처가인 성주를 다녀오는 길에 도산서원에 들려 거유 퇴계선생을 찾아뵙는다. 퇴계와 율곡은 우리 유학사에서 두 사람 모두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스승이요 사상가인 만큼 이 만남을 역사적 만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도산서원에 이틀간 머물며 퇴계 선생과 성리학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 후에도 두 사람은 서신을 주고 받으며 학문을 논하고 정분을 이어갔다. 많은 연령 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알아주는 지음(知音)이었던 셈이다. 퇴계가 율곡을 보낸 다음 제자에게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그의 탁월함을 인정한 것으로 보아 젊은 율곡은 이미 노학자의 마음을 격동시킬 만큼 큰 학문적 성취와 자질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6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간 시묘살이를 하고 29세에 생원 진사시와 대과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여 출사한다. 29세에 호조좌랑에 임명된 율곡은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쳐 36세에 청주목사, 39세에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대사간, 대사헌,호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두루 역임하면서도 학문의 끈을 놓지 않고 많은 저술들을 저작했다. 동호문답,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 인심도심설, 학교모범 등 그가 남긴 저술들은 그 책 하나만으로도 성명할 만한 탁월한 저술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하늘은 재주와 명을 함께 주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 천재는 49세였던 선조 17년 1584년 병사했다. 임진란이 나기 8년 전이었다. 내가 그를 더욱 대단하게 보는 이유는 그가 그냥 공리공론에 빠졌던 사상가가 아니라 전쟁 나기 십여년 전에 미리 10만 양병을 주장하며 국가안보를 거론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가 주장했던 10만 양병이 실현되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10만 병사를 길러 미리 대비했는데도 임진란 같은 전화가 일어났었을까?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국가안보 문제에 대해 탁견을 지닌 선각자들이 있어 미리 경고를 발하는데도 당리당략에 몰두하는 정치몰이배들이 정쟁을 하느라고 실기하여 수 많은 백성들이 참화를 겪어야 하는 비극의 역사는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